알베르트 슈바이처, 아프리카에 헌신한 의사
알베르트 슈바이처, 아프리카에 헌신한 의사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는 1875년 1월 14일 독일에서 태어나 1965년 9월 4일 가봉에서 사망한 신학자이고 의사이며 철학자, 목사, 음악가입니다. 그는 1875년부터 1919년까지 독일 국적으로 살았고, 1919년부터 1965년까지는 프랑스 국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독일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했습니다. 슈바이처는 24세인 1899년에 칸트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00년에 복음서를 연구하여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신학을 전공해서 그는 목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청소년 시절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여, 후에 음악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에 대한 연구로 이름을 날렸고, 파리 음악원에서 오르간과 작곡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특히 오르간 연주로 이름을 크게 날렸습니다.
슈바이처는 30세까지는 학문과 예술활동을 하는 데 전념하고 그 이후부터 인류에게 봉사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의료 봉사를 하기 위하여 7년 동안 의학 공부를 했고 37세인 1912년에 의학박사가 되었습니다. 대학 교수가 될 수 있었음에도 그는 1913년 부인과 함께 프랑스령 아프리카의 랑바레네(현재의 가봉에 위치)로 의료 봉사를 하러 갔습니다. 부인도 남편을 돕기 위하여 간호사 면허증을 준비해 놓고 있었습니다.
슈바이처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독일 국적을 가진 독일인이었기 때문에 프랑스령인 랑바레네에서 프랑스군에 의해 억류를 당했습니다. 1917년에 그는 아내와 함께 프랑스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독일 영토였던 알자스 지방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알자스 지방이 프랑스 영토가 되어 그는 국적을 프랑스로 바꾸었습니다. 프랑스령인 랑바레네에서 자유롭게 의료 봉사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924년에 슈바이처는 다시 아프리카로 가서 환자들에게 무료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대형 병원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의료센터는 주로 열대지방의 질병인 말라리아에 걸린 환자들을 치료했습니다. 그는 또한 아프리카 주민들에게 교육을 통해 다양한 사회복지 사업을 진행하여 그들의 삶의 질을 높이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세계의 위인으로, 원시림의 성자로 불리며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1928년에는 그에게 괴테상이 주어졌습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그의 국적 관계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연합군과 적군 모두 그의 병원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가 아프리카에 병원을 설립, 운영하며 그의 의학적인 지식을 무료로 봉사하는 데 사용함으로써 인류에 대한 사랑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인 사상과 인도주의적 사상에 근간을 둔 그의 다양한 활동은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을 존중하고 동물의 권리와 환경을 보호하는 도덕적인 가치로 일관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1952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은 것은 그의 많은 업적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노벨상 상금을 아프리카에 나환자촌을 건설하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슈바이처는 신학과 음악, 철학 등 각 분야에 걸쳐 책도 많이 썼습니다. 특히 그는 아프리카에 와서 그가 만난 백인과 흑인에 대하여 그의 생각을 쓰기도 했습니다. 아프리카 봉사에 관한 저서인 '나의 생애와 사상'은 그의 대표 저서입니다.
유럽에 오지 않고 죽을 때까지 아프리카에서 의료 봉사를 하며, 그는 인류에게 삶에 대한 큰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의 무덤은 그가 평생 동안 일했던 병원 옆에 있습니다. 간호사였던 그의 부인의 무덤도 같은 곳에 있습니다. 그의 딸 레나 슈바이처 밀러(1918-2008)도 아버지처럼 아프리카에서 의료 봉사를 했습니다. 그의 가족 모두 인류에게 삶의 동기를 크게 부여하는 위대한 삶을 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