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 장군, 한국전쟁에도 참전한 군인 중의 군인!
맥아더 장군, 한국전쟁에도 참전한 군인 중의 군인!
맥아더 장군(General Douglas MacArthur)은 1880년 1월 26일, 미국의 아칸소 주의 리틀록에서 육군 장성인 아버지 아서 맥아더로부터 태어났고, 1964년 4월 5일 워싱턴 D.C. 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는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준장의 신분으로 1919년, 39세의 젊은 나이에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장으로 부임했습니다. 그는 이 사관학교 출신들이 군사학 이외의 다른 학문들을 거의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군사학 외에 교양과목과 정치학, 경제학 과목들을 추가하여 학교 교육과정을 현대화했고, 완전한 인간을 양성하는 교육을 실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1933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1882-1945, 대통령 재임기간: 1933년 3월 4일-1945년 4월 12일)가 미국의 제32대 대통령이 되었고, 맥아더는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루스벨트 대통령이 경제 공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뉴딜 정책(1933-1935)을 실시하며 육군 예산의 51%를 삭감하려고 해서 맥아더는 몹시 분노했습니다. 국방 예산을 줄이기 위해 단기간에 양성할 수 없는 장교들을 감축하겠다는 정부의 정책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참모총장직을 사임하겠다고 대통령에게 요청했고, 대통령은 그의 사임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맥아더는 임무를 계속하며 차량화 부대와 전차 부대를 신설하고 군대의 기동성을 강화하는 데 노력했습니다.
맥아더는 군인으로 활동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1914-1918)과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이라는 두 번의 큰 전쟁에 참전한 군인 중의 군인이었습니다. 그는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에서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역할을 했는데, 필리핀에서 미군-필리핀 연합군이 1942년 4월 9일 일본군에게 항복하게 되자, "나는 돌아올 것이다 I shall return"라고 하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 말은 일본에 복수하려는 그의 의지를 표명한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 :
일본이 패전하자, 1945년 8월 29일, 맥아더는 연합군에 점령당한 일본에 머물며 일본의 재건을 위하여 사회 체계 형성에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점령군의 사령관으로서 그는 미국의 워싱턴으로부터 명령을 받아 일본의 천황을 명목상의 군주로 만들고 일본을 실질적으로 통치했습니다. 그는 천황의 이름으로 일본인들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천황의 신성성을 깎아내렸습니다. 그러면서도 맥아더는 일본을 많이 선처해 주었고, 또 연합군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한 핵 공격의 잔인성을 말하여 일본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도 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또한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에서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북한이 남한으로 쳐들어온 위급한 상황에서 그는 인천 상륙작전을 펼쳐 북한군을 후퇴시키며 전쟁의 상황을 역전시켰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이 북한과 합세하여 남한 타격에 가세하자 맥아더는 미국이 중국과 전면전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중국 본토를 공격하고 중국에 핵을 사용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해리 트루먼(1884-1972, 제33대 대통령, 재임기간: 1945년 4월 12일-1953년 1월 20일)의 정책과 달라서 거절당했습니다. 그러자 맥아더는 1951년 4월, 대한민국 정부의 동의를 얻어 중국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이 사실을 트루먼 대통령이 알게 되어 맥아더는 해임되었습니다. 그는 해임되었지만 한국인들은 지금도 그의 인천 상륙작전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가 중국까지 공격했다면, 트루먼이 그때 맥아더의 뜻을 허락했다면, 지금처럼 한반도가 둘로 나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되기도 합니다. 맥아더는 미국에 있었을 때에는 항일 독립운동가인 박영훈 등을 도와 한국의 자유를 위해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맥아더는 8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세계의 큰 전쟁에 두 번이나 참전하고 한국전쟁에서도 맹활약하며 훌륭한 군사적 지휘력과 통찰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독특하고 자주적인 결정력과 굳건한 군사적 노선은 때때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세계 여러 국가의 자유와 안보를 위하여 군인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한 그의 업적은 미국은 물론 세계 역사에 큰 영향을 주어, 역사학자들과 군사 전문가들은 그의 행적을 지금도 연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