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리더십의 윈스턴 처칠 ! 막장 상황에서도 무엇이든지 해 봐 !
강력한 리더십의 윈스턴 처칠 ! 막장 상황에서도 무엇이든지 해 봐 !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영국의 정치인입니다. 1874년에 태어나 1965년에 사망할 때까지 영국의 제61대 총리와 제63대 총리를 역임했던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험난한 시대도 통과했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 시대에 영국에서 최초로 총리가 되었다는 것 외에도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이끌었다는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윈스턴 처칠은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기병을 중심으로 공부를 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학교 졸업 후, 군인과 종군기자 역할을 하며 인도 토후국과의 전투, 쿠바 반란 게릴라전 등에 참여하며 전투에 대한 경험을 현장에서 체험했습니다. 처칠은 제대 후에는 보어전쟁에 장교로, 종군기자로 참전하면서 전쟁의 참상을 본국에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 전쟁에서 처칠은 보어군 게릴라 부대에게 붙잡혔는데 기지를 발휘하여 탈출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보어전쟁 중이었던 남아프리카의 길을 잘 몰라서 처칠은 길을 물으려고 어느 집에 들어갔습니다. 다행히도 그 집에는 영국인 이주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집주인은 같은 영국인인 처칠에게 보어말을 가르쳐주고 보어인으로 위장시켜 주어서 처칠은 무사히 포르투갈령 모잠비크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군인과 종군기자로 활동하며 치열한 전투에 참여한 처칠은 대담한 담력 때문에 의도치 않게 영국군에게 피해를 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처칠은 초급장교이면서도 사단장에게 바른말을 하여 미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처칠은 죽음을 무릅쓰고 전쟁터 일선을 누비는 희생을 감수했고,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두 번의 대전을 겪으며, 무엇이든지 해봐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로 국가의 위험한 순간에 대처했습니다. 그 대가로 처칠은 영국 국민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처칠은 웨스트미스터 대학에서 철의 장막 연설을 하며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유럽이 양분되어 냉전이 계속될 것임을 예상했습니다. 영국은 미국과의 관계를 계속 이어가며 자유진영을 이끌어갈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1992년에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웨스트미스터 대학에서 냉전이 끝났음을 선언함으로써 처칠이 냉전을 예고했던 같은 장소에서 냉전이 종결되었습니다.
정치인으로서 처칠은 처음에는 영국 보수당 소속으로 활동을 했지만 영국 자유당으로 당을 바꾸었고, 자유당이 몰락하자 다시 보수당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인들은 처칠을 당을 그때그때 바꾸는 철새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처칠은 생각 없이 무작정 당을 바꾼 것이 아니었고, 당의 정책과 그의 주장이 다를 때, 또는 어쩔 수 없이 당을 바꾼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처칠은 노동당, 자유당, 보수당 등 모든 당을 아우르는 내각의 수반인 총리가 되었습니다.
처칠은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은 영국의 유일한 총리가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만약 내가 죽는다면 독일군은 내 시체를 집무실의 의자에서 끌어내려야 할 것이다"라고 하며 런던을 떠나지 않고 지하 대피소에서 공무를 수행했습니다. "마지막에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신념으로 처칠은 독일군과 맞서 연합군의 승리를 이끌어내었습니다. 전쟁의 위험한 상황 속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강력한 투지를 발휘함으로써 처칠은 영국인들에게 위대한 정치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1895년경부터 군사교육을 받고 여러 전투에 참여하면서 처칠은 뛰어난 리더십과 대단한 담력, 강력한 통솔력, 단호한 결단력을 발휘하며 영국을 수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1940년 6월 4일, 처칠은 "전투의 통곡"이라는 연설에서 절대로 굴복하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하며 제2차 세계대전으로 위기에 빠진 영국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습니다. 처칠의 강력한 지도력으로 영국인들의 저항정신은 크게 고취되었고, 그 결과로 영국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었던 것입니다.
두 번의 세계대전 중에도 영국이라는 국가가 거대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막장의 상황이라도 뭐든지 해 봐야 한다는 처칠의 강력한 담력과 결단력, 지도력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