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골 대통령, 프랑스를 위해 강력하게 투쟁했다!
드골 대통령, 프랑스를 위해 강력하게 투쟁했다!
샤를 앙드레 조제프 마리 드골은 1890년 11월 22일에 태어나 1970년 11월 9일에 사망한 프랑스 정치인입니다. 드골은 철학자, 문학작가, 역사가 등을 배출한 명망 높은 가문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부터 군사학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드골은 1909년 생시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12년에 졸업했습니다. 드골은 1913년에 임관하면서 페탱 보병연대에 배치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중위로 전쟁에 참가하였습니다. 참전동안에 3번이나 부상을 입었고 2년 8개월 간 독일군 밑에서 포로생활도 했습니다. 드골은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했고, 자신의 군사이론을 적용하여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드골은 군인으로, 정치가로 활동하며 프랑스의 국익을 위하여 헌신하였지만 프랑스 국민들은 그를 그렇게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특히 좌파 정치가들은 드골이 가톨릭교도인 군인 출신의 정치가라는 점에서 그를 마땅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우파 정치가들은 드골이 자신을 도와주었던 페탱 장군을 배신한 사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드골은 페탱의 도움으로 소령으로 진급하기도 했으나 1938년 페탱의 원고를 무단으로 수정하여 자신의 이름으로 저서를 발간했던 것입니다. 물론 드골은 페탱이 비시 정부(나치 독일의 괴뢰 정부) 수립의 주동자라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자 무기징역으로 낮추는 데 큰 역할을 하기는 했습니다.
1940년 6월, 프랑스 정부는 나치 독일에게 항복을 선언했고, 드골은 이에 불복하여 영국으로 망명했습니다. 1940년 8월 2일, 드골은 그동안의 여러 국내외적인 상황으로 인하여 영국에서 자신의 지위가 박탈되고 재산이 몰수되는 것을 볼 뿐만 아니라 사형선고까지 받았습니다.
영국으로 망명한 후 드골은 망명 정부인 자유 프랑스위원회를 조직해서 당시의 영국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런던에서 드골은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자신과 함께 독일 항전을 계속할 것을 프랑스인들에게 호소했습니다. 영국의 비밀첩보기관을 통한 그의 레지스탕스 지하운동, 자유 프랑스위원회 활동 등으로 드골은 자신의 지도력을 확장했습니다. 그가 1940년대에 독일에 대항하고 시민 불복종 이념(인도의 간디가 주장한 이념)에 반대할 때 프랑스인들의 화합이 조금은 수월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군사지도자로, 정치가로 다채로운 활동을 하다가 드골은 1958년 6월 1일 제78대 프랑스 총리가 되어 1959년 1월 8일까지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1959년 1월 8일부터 1969년 4월 28일까지는 프랑스 제5공화국의 제18대 대통령이 되어 드골은 프랑스를 강력한 국가로 만드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그는 총리와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의회와 정당의 기능보다는 국민의 지지가 국가의 위기상황을 극복하는 데 가장 중요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정책을 폈습니다. 130여 년 동안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가 1962년에 독립을 하면서 그의 위상이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드골은 1962년에 대통령으로 재선 되었고 유럽경제공동체(EEC)를 이용하여 프랑스 농업을 활성화하기도 했습니다.
군사와 정치 분야에서 활동하는 동안, 드골은 프랑스 민족을 배반하는 인간을 만들지 않겠다는 강력한 신념을 가져서 긍정적인 평가도 얻었고, "내가 곧 프랑스다."라고 해서 독재자라는 부정적인 평가도 얻었습니다. 특히 프랑스 철학자이고 소설가인 사르트르는 그를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서로 상반되는 그러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가 20세기 프랑스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위대한 인물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