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아네트! 오스트리아 공주가 프랑스 왕비가 되어 단두대에서 사라졌다!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아래 링크)는 18세기말 프랑스의 여왕이었습니다. 그녀는 1755년 11월 2일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의 쇤브룬 궁전에서 태어났고 1793년 10월 16일 프랑스 파리 콩코르드 광장의 단두대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앙투아네트는 두 국가의 동맹관계를 위하여 14세 때 후일 프랑스의 왕이 될 루이 16세(1754년 8월 23일 -1793년 1월 21일, 재위기간 : 1774년 5월 10일 -1792년 9월 21일)와 결혼하여 베르사유 궁전에서 생활했습니다. 두 사람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거대한 시기를 통과하며 왕족으로서의 삶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생을 마쳤습니다. 그녀의 유해는 파리 근교에 있는 생 드니 대성당에 남편과 아들의 심장과 함께 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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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는 아름답고 풍부한 의상과 사치와 도박 등 화려한 생활방식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녀는 어머니의 아름다운 외모를 물려받아 미인이었고, 또 음식을 많이 먹지 않아 프랑스 왕족들과 달리 날씬한 몸매를 가졌습니다. 밑바닥이 동그란 형태의 프랑스 샴페인 잔은 그녀의 예쁘고 섹시한 젖가슴 형태를 모방한 것이라고 합니다. 패션 감각도 뛰어나 마리 앙투아네트는 당시 유럽의 패션을 이끌어가기도 했습니다. 벌집처럼 높이 틀어 올린 머리를 하고 입는 화려한 드레스와 검소한 모슬린 드레스는 그녀가 유럽에 유행시킨 패션입니다,

1789년에 프랑스혁명이 발발하면서 국민들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스러운 궁궐 생활에 대하여 불만을 많이 가지고 프랑스 왕가를 증오하였습니다. 혁명기의 어려운 시절에도 그녀는 혁명 이전 때처럼 화려한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왕비로서 왕가의 전체 생활을 관리하지 않고 그녀는 오직 거처인 궁전에서 자신의 측근들하고만 연회를 열며 목가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국민들은 그녀가 프랑스의 경제적 어려움을 외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793년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는 가혹한 해였습니다. 혁명 정부는 그녀에게 오스트리아와 결탁하여 프랑스의 안보를 위협했다는 반역죄를 적용했고, 또 사치한 생활로 국고를 낭비했다는 죄를 적용하여 그녀를 처형했습니다. 그녀는 허름한 옷을 입고 두 손을 묶인 채로 단두대에 올라 사형을 당했습니다. 단두대는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루브르 궁궐 근처의 콩코르드 광장에 세워졌는데, 이 광장에 모인 대중은 그녀에게 파티를 자주 여는 등 너무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고 하며 증오의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녀는 대중의 욕설을 들으면서도 침착하게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인 루이 16세도 이 단두대에서 그녀보다 10개월 전에 이미 처형을 당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은 다른 한편으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그녀의 사치와 유흥의 삶이 지나치기는 했지만 사형을 받을 정도로 중대하지는 않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프랑스혁명의 희생자로 보기도 합니다. 당시에는 귀족들이 사치와 도박을 해서 그들과 어울리기 위하여 그녀도 어쩔 수 없이 그러한 생활을 했고, 또 외국 왕실에서의 생활이 여러 이유로 힘들어 우울감을 극복하기 위하여 그녀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혁명기에 새롭게 권력을 잡은 부르주아 계급들은 왕가를 좋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화려한 삶을 사는 마리 앙투아네트는 당연히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어떤 점에서 보면 프랑스 왕족들의 삶과 그렇게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녀는 사회의 새로운 세력인 부르주아들의 악의적인 평가에 의해 과도하게 비난을 받고 처형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선한 행동들은 당시의 부르주아들에 의해 많이 왜곡되어 전해졌다고 합니다. 그녀는 혁명 시기에 사치로운 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가난한 대중에게 자선을 베풀기도 했습니다. 굶주린 백성들이 값싼 감자 빵 대신 밀가루 빵을 달라고 요구하자 그녀는 제빵학교를 열어 백성들의 식량을 지원했습니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어라"라는 말은 그녀가 시녀와의 대화 중에 한 말로 알려져 있는데, 이 말로 인해 그녀는 배고픈 백성의 삶을 모르는 매정한 왕비로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그녀가 한 말이 아니고, 혁명파들이 민중의 분노를 왕비 쪽으로 돌리기 위하여 그 말을 그녀가 한 것으로 퍼뜨렸다는 설도 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프랑스라는 외국에서 왕비로 살았던 인물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등 여러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녀 삶의 비극적인 종말은 인간의 삶이 정치적 상황 속에 복잡하게 얽혀 나타난 현상이라고 볼 수 있어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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