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 시민 혁명의 시대와 제국주의 시대 사이에서 기지를 발휘한 프랑스 정치인
프랑스의 정치가이고 군인으로,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프랑스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년 - 1821년)는 이탈리아계 프랑스인으로 프랑스 영토인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났습니다. 나폴레옹은 변호사 집안에서 태어나 프랑스의 브리엔 군사학교에 들어가서 군사전략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훌륭한 전략가로 활약하며 정치와 군사 분야에서 프랑스를 지도하는 많은 업적을 이루어낼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35세에, 카를 3세 이후 프랑스 최초로 황제가 되어 프랑스의 경제와 법률, 교육, 행정 등 다양한 영역에서 혁신을 단행하였고, 탁월한 군사전략으로 각종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프랑스 제국을 확장했습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은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동북부를 제외한 전 지역, 크로아티아, 아이티 등을 모두 다스렸습니다.
나폴레옹은 1799년 쿠데타(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라고도 함)를 일으켜 프랑스를 집권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스스로 황제가 되었습니다. 프랑스혁명 이념인 자유주의 사상을 유럽에 널리 전파하며 프랑스를 유럽의 강대국으로 부각하는 데 나폴레옹의 업적이 빠질 수 없습니다. 나폴레옹이 통치하던 당시에는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 나폴레옹 사상에 기반을 둔 법치주의, 시민 평등사상이 퍼져나갔습니다. 특히 나폴레옹 본인이 가장 긍지를 가졌던 나폴레옹 법전은 세계사에 남아있는 큰 업적이 되었습니다. 국민 교육제도를 확립하고 프랑스은행을 설립한 것도 나폴레옹의 주요 업적입니다.
그의 군사 캠페인이 유럽 전역에서 이루어졌고 아우스터리츠 전투 등 각종 전투에서의 승리가 프랑스의 영토 확장에 기여했습니다. 특히 여러 전투를 치르는 동안 프랑스 육군은 선진화되면서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갖추게 되어, 유럽의 다른 국가들은 나폴레옹의 군대 체제를 따랐습니다.
나폴레옹은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시민 혁명의 시기와 19세기 제국주의 시기를 통과하며 프랑스와 유럽 등 세계 역사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는 데서 그 의미가 특이합니다. 권력을 이용하여 세계를 지배하려고 하는 그의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의 외교와 프랑스 대혁명이 가져온 자유주의 사상은 나폴레옹의 통치에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만민의 평등을 기원하며 일어난 1789년의 대혁명 이념이 나폴레옹 황제라는 독재자의 정권으로 이어졌다는 생각으로 프랑스혁명 지지자들의 반감이 컸습니다.
국민국가를 건설하여 주권을 독자적으로 확산하는 것을 염려하는 유럽 강대국들의 제동도 나폴레옹의 통치에 방해가 되었습니다. 유럽의 정통 왕실들은 황제 나폴레옹이 그들의 기존 지배질서를 흔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의 확장주의 정책은 유럽의 구체제 국가들의 반발을 사서, 그는 그들과의 전쟁에서 많은 제약을 받았습니다. 유럽 왕실의 사람은 아니었지만 독일의 베토벤도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를 반대했습니다. 베토벤은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기 전에는 나폴레옹을 가난한 사람들의 영웅이라고 생각하여 그에게 3번 교향곡을 헌정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를 하자 교향곡 헌정을 취소하였습니다. 3번 교향곡은 위대한 사람을 추억하기 위해 쓰였다는 이유에서 입니다.
나폴레옹은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하고 프랑스 제국을 통치했음에도 패배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가 1806년 11월에 베를린 칙령으로 내린 대 영국 무역금지법(대륙봉쇄령)을 러시아가 무시하고 계속 통상을 하여 이에 대한 응징으로 그는 1812년 61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 정벌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미 후퇴를 하여 모스크바는 텅 빈 도시가 되었고, 더구나 1812년 9월 경, 모스크바에는 6일 동안이나 큰 불이 나서, 나폴레옹 군은 일찍 다가온 러시아의 추위와 허기에 지쳐 퇴각을 했습니다.
1812년 러시아 침공의 실패와 1813년 8월의 반불 동맹군의 결성으로, 나폴레옹은 1814년 4월 퇴위를 하고, 지중해 이탈리아 반도 근처의 엘바 섬에 유배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탈출했으나 백일천하로 끝났고 1815년에 다시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유배 생활 동안에 나폴레옹에 대한 처우는 취약했으나, 그의 시종들은 그의 총애를 서로 받으려고 다투어서, 그는 "내가 너희 마누라냐?"라고 하며 투덜대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유배 생활로, 또 질병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1821년 52세로 사망했습니다, 사망 후에 부검을 했는데 그의 사인은 위암으로 나왔습니다. 나폴레옹은 평소에 손을 늘 배에 얹고 있었는데 이유는 아마 배가 아파서였을 거라고 합니다. 프랑스 왕실에서 나폴레옹에게 포도주를 유배지에 계속 보내주었는데 포도주에 소량의 독을 계속 넣어 보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의 생애는 52년이었지만 나폴레옹은 프랑스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로 그의 군사 전략과 정치 지도력은 많은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