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트마 간디, 인도의 독립과 건국에 헌신한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는 1869년 10월 2일 인도의 구자라트 포르 반다르에서 태어나 1948년 1월 30일 인도의 뉴델리에서 사망했습니다. 간디는 영국의 지배를 받던 인도의 작은 공국에서 유능한 총리로 일했던 아버지 카람찬드 간디와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인도의 명문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영국의 이너템플 법과대학에 갈 수 있었고 그곳에서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영국에서 체류하면서 간디는 채식주의에 관심을 갖고 런던 채식주의협회에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1891년 7월에 인도로 돌아와 변호사 자격증으로 일자리를 구했으나 쉽지가 않아서 소송인의 탄원서를 작성해 주는 일을 하며 생활을 했습니다. 이후 간디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나탈에 있는 인도인 회사에 취직이 되어 그곳에 가게 되었고, 그곳을 새로운 도전의 땅으로 생각하며 20년간 인종차별과 인권침해에 항거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20세기 인도의 정치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사상가로 알려진 것처럼, 간디는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대에 살며 인도의 독립을 주장하면서도 정치적 목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비폭력주의가 그를 대표하는 사상이 되었습니다. 비폭력주의는 시민의 복종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시민의 불복종을 강조하는 데 있어 인도의 독립에 큰 역할을 한 사상입니다. "빈 손으로도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라는 슬로건이 간디의 비폭력적 저항의 원리입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와 넬슨 만델라가 간디의 비폭력적 저항의 원리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간디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인도인들이 인종차별을 받는 것을 보고 인도인의 단결을 강조하기 위하여 1894년에 나탈 인도국민회의를 창설했습니다. 1899년 발발한 보어 전쟁이 끝난 후에는 시민 불복종 운동이 간디의 주된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행한 시위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소금 행진입니다. 이 행위는 영국의 소금 모노폴리에 대하여 비폭력적인 대항을 함으로써 인도의 독립 의지를 강력하게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1914년 7월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떠나 인도로 돌아온 간디는 종교적, 인종적, 경제적 차이 등 다양한 형태로 분열하는 인도인들을 단결하게 하고 인도인들 간의 평등의식과 상호이해를 고취시키며 인도에 자주적인 독립을 안겨주려고 노력했지만 쉽지가 않았습니다. 특히 종교 문제를 파악하기 위하여 간디는 여러 종교를 비교 연구했는데, 그가 얻은 결론에 의하면, 모든 종교는 진실하지만 부족한 지성과 진실하지 않은 마음에 의해 오역되어 불완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종교 문제를 해결하려는 간디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인도 사회는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그 여파로 간디는 1948년 힌두교 급진주의 무장단체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간디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 영국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정치적 입장에서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1919년 영국이 민중을 탄압하는 법인 롤래트 법을 제정하자 영국의 지배에 저항하며 인도의 독립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그를 지칭하는 마하트마라는 용어가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을 지닌 것처럼 그의 사상과 행위는 현재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세계인들의 영혼에 큰 가르침을 줄 것입니다. 간디의 사상이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주고 지침이 되는 것은 그가 인종차별 철폐와 인간평등의 사상을 주장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민족주의자로서 자신의 나라인 인도의 독립을 가져오는 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